옛날 순당 채진형 어른이 임진왜란에 임금께 내복을 드린 공로로 전쟁 후에 벼슬을 하사받았는데, 이것을 마다하고 처가가 있는 몽정이 장인어른 댁에 머물고 있었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꿈에 지역이 아담하고 산수가 수려한 곳이 현몽하였다. 그 다음날 깨서 그곳을 찾았더니 지금의 몽촌 마을이라고 한다. 이곳에 터를 다듬고 연못을 파서 순채를 심어 마을을 이루었다고 해서 호가 순당이 되었고 마을을 꿈에서 봤다고 하여 마을이름이 몽촌(꿈마을)이 되었다. 마을을 이룰 때 심었던 은행나무가 지금은 보호수가 되었다. • 제보자 : 덕산읍 용몽리 몽촌 마을 채재병(남, 82)
옛날 덕산면 몽촌에 효자 채경언이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부친이 병들어 사경을 헤멜 때 斷指(단지)하여 소생시켰고 다시 병이 나자 연못 위 얼음에 밤낮으로 꿇어 엎드려 비니 난데없이 잉어가 나타나 부친께 올려 회복되었다고 한다. 또 모친이 위독하자 역시 단지하여 그 피로 소생시켰다. 부모가 나이들어 돌아가시자 삼년씩 육년 간은 待基(대기)하여 주변 사람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고 그 소문이 퍼져 급기야 인조대왕께서 정문을 내렸다고 한다. • 제보자 : 덕산읍 구산리 상구 마을 김정득(남, 82), 고세원(남, 67)
구산리 상구마을에 약수샘이 있는데 옛날에 무학대사가 지나다가 샘이 있는 자리를 가리키 면서 " 이 자리는 분명 약수가 날 자리로다"하고 하였는데 그 자리를 지팡이로 찔러보니 샘이 솟았다고 한다. • 제보자 : 덕산읍 용몽리 몽촌 마을 채재병(남, 82)
덕산면 석장리 장암 아랫돌실에는 옛날 농지정리를 하면서 마을 앞의 두 바위 사이를 흐르 던 시내의 흐름을 바꾸었는데 그후로 마을에 흉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고 믿는다. 방 한 칸 만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시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있었는데 경지 정리를 위해 내를 막 고 그 뒤편으로 시내를 내었다. 통행에 방해가 되어 바위를 없애려고 하였지만 바위를 신성 시하던 한 마을 사람이 간청하여 그대로 두었는데 해마다 여름철이면 물에 씻겨 내려오는 토사에 바위가 묻히게 되었다. 어느날 동네를 지나가던 한 사람이 이것을 보고 "왜 바위를 소홀히 하는가? 이 바위 때문에 이 동네가 부촌이 된 것인데 이렇듯 소홀히 하니 마을이 편 안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동네가 전보다 상당히 못살게 되었으며 특히 사람들이 많이 죽어나갔다. • 제보자 : 덕산읍 석장리 아랫돌실 이정수(남, 59), 이찬목(남, 80)
진천에는 방골 큰애기 납채받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옛날에 방골 부락에 사는 큰 애기가 초평에 사는 총각과 결혼을 하게 되었는 데 결혼식날 신부인 큰애기가 초례청에 들어서서 신랑을 딱 보는데 신랑의 사모에 뿔이 없었다. 뿔이 없 는 사모는 재취자리다. 뿔없는 사모에 놀라서 큰애기가 졸도하고 결국은 깨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평상시 착하고 예뻤던 방골의 큰애기를 기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이 비석을 세 워줬다. 그리고 종도 같이 묻었다. 노래도 전해졌는데 잊어먹었다. 옛날 조선시대에도 평양 에 가서 진천에서 왔다고 하면 방골 큰애기 얘기를 물었다고 한다. 지금도 [방골큰애기] 노래가 전해진다. • 제보자 : 진천읍 가산리 가암 마을 김용구(남, 78), 이규복(남,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