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백면 구곡리에 위치한 농다리는 장마 때에도 소실되지 않도록 축조된 다리로써 문화재로 지정된 다리이다. 이 다리에는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에 힘좋은 남매가 살고 있었는데 힘자랑을 서로 하다 내기에서 지면 죽기로 하고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 갔다 오기로 하고 딸은 다리를 놓기로 했다. 딸은 다리를 다 놓아 가는데 아들은 보이지 않자 애가 탄 어머니가 딸에게 뜨거운 팥죽을 주면서 힘드니까 먹고 하라고 했다. 딸은 다리를 거의 다 놓았으므로 팥죽을 받아먹었는데 그 사이에 아들이 와서 딸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의 끝 부분이 엉성하다.
정철의 산소가 원래는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 있었는데 송시열이 말부리 고개에서 산을 보니 지금의 송강사 자리가 명당자리라서 이장했다. 산소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가시밭이었던 곳에 마을이 들어섰고 마을이 들어서면서 나무를 심었는데 지금 한 400년이 되어 보호수가 되었다. 그리고 송강의 후손이 16대째 세거하고 있다. 군보호수는 수령이 400년이고 높이가 16m이고 둘레가 4.2m이다. 82년부터 군보호수로 지정되었다. • 사진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농다리 건너에 산이 하나 있는데, 산이 용날같이 생겼다. 그밑은 넓은 벌판에 부자촌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떤 중이 시주를 하러 왔다. 그러나 부자 마을 사람들은 시주를 하나도 안주었다. 중이 다시 찾아갔더니 귀찮다고 하면서 쇠똥을 주었다. 중이 괘씸히 여겨 그 마을 사람들에게 고생을 시키려 생각하고 용날같은 산을 닦으면 큰 부자가 된다고 말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에 혹하여 용날 허리를 잘라 산을 뚫어 길을 닦았다. 그러자 용허리에서 피가 솟아나고 그 부자 마을은 망했다 한다. 용허리에서 피가 나왔다 하여 피서대라 했는데 지금은 절벽아래 물이 도도히 흐르고 피서대 밑에 마을의 터가 남아 있다. 현재도 주춧돌이나 기와장이 이 벌판에서 나오며, 옥비녀도 캐냈다 한다. 물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용코라는 것이 있는데 아무리 추워도 그곳은 용의 더운 코 입김으로 얼지 않는다고 한다.
문백면 구곡리 내부에 앞산이 있는데 예전에 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 그 산만 제비꼬리 만큼 남았다 하여 제비산이라 했다 큰 물이 나면 이 산이 가로막아 홍수를 막아 주기 때문에 부모의 역할을 한다하여 지어미산, 지미산이라 불리운다. 이 산은 진천의 수구막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밑 북쪽에 묘가 하나 있는데 목마른 말이 물먹는 형국이라 하여 갈마음수형이라 한다.
이 마을에 아홉 개의 골이 있다하여 구곡이라는 설도 있으나, 산이 거물형국이라 굴터(九谷)라고 했는데 예전에는 龜山동이라 했다. 그런데 일제시대 왜구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보고 반발을 느낀 왜구들이 될수 있으면구(龜)자를 빼어 구곡리라 쓰여지고 있다.
옥수같이 맑은 물을 따라 평사에서 은모래 밭을 밟고 수려한 경관 십 여리 가면 갈궁저리라는 동네가 나타난다. 이 동네 앞에 기암 절벽이 있는데 그 밑에는 명주 실타래가 몇 타래 풀려 들어갈 만큼 깊은 물이 있다. 이 물에 서린 이야기가 있는데, 옛날에 용이 되려는 한 뱀이 있었는데 뱀이 용이 되려는 들에서 10년, 산에서 10년, 물에서 10년, 30년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 뱀이 어렵게 30년을 살고 용이 되기 위해서 안개를 타고 올라가는데 어느 임신한 아낙네가 용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부정이 들어 용이 되어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말았다. 그후 이 깊은 물이 "이소이 소"라고 하였으며 이때부터 이 부근에 소를 매어 놓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이소이가 나와서 소를 잡아 먹고는 물로 들어가고, 일년에 한번씩 물 밖에 나와서 기어 다니는 통에 부근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일년중 7월 칠석날엔 처녀 한 사람씩을 잡아 먹었다고 한다.
우담은 첫째 물이 맑고 깊으며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흡사 해수욕장을 연상케 한다. 이 밖에 동서로 길게 뻗은 산은 기암절벽이니 등으로 두타산이 우뚝 솟아 있고 서쪽으로 중류엔 양천산이 솟아 있으며 하류에는 태봉산이 있고 상류에는 유명한 등다리와 봉성대, 오동탄, 별암,기암절벽, 치적태 등이 있다. 하류에는 있는 태봉사는 조선말기 왕의 태를 묻었다하여 이름이 생겼다 하며, 이산의 끝이 용의 머리 같이 생겨 마치 내를 건너는 형상이라 하여 도룡골(渡龍)이라 불린다. 또한 일설로는 민비가 권세를 이용하여 태봉산을 만들기 위해 많은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송강선생의 묘가 있는 은골에 이름난 명산이 있는데 그산에 돌로 쌓이고 우묵하게 생긴 우물이 하나 있다. 결혼 전날 신부집에 보내는 함과 같이 생겼다하여 함샘이라 부르는데 예전부터 이름난 샘이다. 아들을 못낳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이 여기서 기도를 하면 원하는 자식이 생겨 소원이 이루어 진다고 한다. 이 샘은 매우 신성한 명샘으로 근처에서 짐승이나 벌레 한 마리도 잡아서는 안되며, 이 산에 사냥꾼이 총을 겨냥해도 총알이 터지지 않아 짐승을 잡지 못한채 나갔다 한다. 그리고 샘 근처에는 침을 뱉거나 방료를 해도 절대 안되며 짐승들 마저 자그마한 벌레를 보아도 잡아먹지 못한다. 옛날에 이 마을 쌍지팡라는 남자 무당이 살았는데 일자 무식인데다 어찌나 점괘가 잘 맞는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 사람은 절이 10여 칸 줄을 이어 짓고 살았는데 하루는 근방에 병아리가 어른 거르니 들고 있던 지팡이로 병아리를 죽이고 말았다. 샘 근처에서 동물을 죽였으므로 쌍지팡이는 얼마 못가서 벌을 받아 죽고 말았다. 절도 지어만 놓고 사용하지 않은채 쓰러져 없어졌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굴티 앞에 서있는 바위로 예전에 굴티에서 임장군 남매가 하루 아침에 미호천에 다리를 놓기로 내기해서 임장군은 돌을 모아 놓기로 하고 누이장군은 긴 바위한개로 걸쳐놓기로 작정해서 누이 장군은 여러 곳을 다니며 이 바위를 구해가지고 와서 보니까 벌서 임장군이 다리를 다 놓았으므로 화가 나서 그 바위를 지금의 굴티 앞에 던졌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