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진천군청

유래 및 연혁

• 광혜원리

광혜원터(廣惠院-)

광혜원이라는 원이 있던 자리이다. 지금의 광혜원중학교 남동쪽이 된다. 원은 고려,조선시대에 역과 역 사이에 두어 공무를 보는 벼슬아치가 묵던 공공 여관이다. 원터 옆에 정자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와 퇴임하는 관찰사가 서로 관인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바듬말/버듬말

주막거리에서 개울 건너 맞은편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베짜는 바디와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아울러 버드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버들말이라 부르다가 버듬말이 된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바듬말은 버듬말에서 모음이 변한 어형으로 추정되고, 버듬말은 버든말의 자음동화 형태로 추정된다. 버든은 벋-의 관형사형이어서, 버든말은 길게 뻗은 마을로 해석된다. 아울러 버듬말이나 바듬말도 그와 같은 의미를 띤다.

재경골/재양골

광혜원 서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면사무소 뒤로 이주하였다. 아주 크고 부유한 마을이라 처음 마을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이 서울이 아닌가 착각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전국에 재경골이라는 지명이 흔하다. 재경을 在京으로 보아 서울에 있는 고을로 설명하기도 하고, 재경을 재경나무(자작나무)로 보아 자작나무가 많은 골짜기로 설명하기도 한다.

화랑들(花郞-)/화랑벌(花郞-)

광혜원중고등학교 옆에 있는 들이다. 김유신 장군이 화랑도를 거느리고 훈련을 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이곳에 화랑궁터가 남아 있다.

돌봉거지

수문 대산골 마을을 들어오기 전에 마을 입구에 돌을 쌓아 놓은 것이 보이는데 이 돌봉거지를 건드리면 마을에 큰일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걸 건드리면 마을여자들이 바람이 난다고 믿기 때문에 이 돌을 건드리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또 이 돌봉거지는 마을을 수호하는 수석으로 믿고 있다. 돌봉거지와 같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 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는다. [진천의 민속]

• 실원리

관청샘(官廳-)

동주원 서남쪽에 있던 샘이다. 지금의 동주원저수지 가운데에 있었다고 한다. 관청이 있었고, 그 관청에 딸린 샘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수질이 좋아 신라 시대 화랑들이 식수로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동주원(東注院)

실원리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역원제도가 있던 당시 원사가 있어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했다. 당초 죽산군 남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진천군 만승면에 편입되었다. 도로를 중심으로 서쪽은 웃말, 동쪽은 아랫말로 나뉜다.

원대(院垈)/원터(院-)

동주원 큰길가 주변이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들의 편의를 제공하는 여관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원이다. 원에는 그 원을 경영하는 원주가 있었는데, 흔히 부근에 살고 있던 사람 가운데 유능한 자로 임명하였다. 원은 처음에는 관원만이 이용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일반여행자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반인을 받으면서 원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주막으로 변신하게 된다. 곧 원은 여관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원이 있던 자리가 원터이고, 이에 대한 한자 지명이 원대이다.

• 구암리

덕성산(德聖山)

안성시 죽산면과 진천군 광혜원면 경계에 위치한 높이 506m의 금북정맥 능선상에 있는 산이다. 비들목 뒤에 있다. 산 정상에서 기왓장, 토용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토용을 주워 집으로 가져오면 부정을 탄다고 어른들이 크게 꾸중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산을 경계로 신라와 백제가 대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 산 아래인 무술과 비들목에 신라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무술/무수(無愁)

병무관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80여 호가 살던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조선 연산군 때 조정의 선비가 사화를 피하여 이곳에 와서 아무 걱정 없이 지냈다고 하여 무수라 명명한 것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무술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면, 무수는 무술에서 변형된 어형으로 추정된다. 무술에 대해서는 김유신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이 또한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전국에 무술이라는 골짜기 또는 마을 이름이 몇 군데 존재하는데 그 유래가 분명하지 않다. 가술, 여술 등에 보이는 술과 같은 것으로 보이며, 산의 뜻일 가능성도 있다.

병무관(兵武館)/병목안

무술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병무관에 대해 화랑이 훈련하던 연무대와 무기를 보관하던 병기고가 있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병무관은 병목안의 변형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병목골이 병무골로 나타나듯, 병목안도 병무관으로 나타날 수 있다. 병목안은 병의 목같이 생긴 안쪽을 지시한다. 전국에 병목안이라는 골짜기 또는 마을이 대단히 많다. 이곳 병목안도 병목처럼 생긴 초입을 지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비들목/구항(鳩項)/구항리(鳩項里)

병무관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비들을 비둘기로 보아 예전에 비둘기를 통신전령으로 훈련시키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비둘기가 많은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비둘기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 지형이 비둘기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 등으로 설명한다.

사장골

병무관 남쪽에 있던 마을이다. 네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너무 외져 위험한 곳이라 하여 이주시켰다고 한다. 사장을 射場으로 보아 신라 화랑들이 활을 쏘고 훈련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전국에 사장골이라는 골짜기가 적지 않은데,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는 지역도 있지만 대체로는 사장나무(당산나무, 마을 앞 둥구나무)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 회죽리

댓골/죽동(竹洞)

회안이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대는 竹의 뜻이어서, 댓골은 대나무가 흔한 마을로 해석된다. 이에 대한 한자 지명이 죽동이다. 그런데 이 마을에 현재 대나무는 없다고 한다. 일설에 이곳에 붓장사가 살아서 붓을 만들기 위해 늘 대나무를 쌓아 놓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활을 비롯한 대나무를 이용한 병장기를 만들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왕재(王-)/왕재고개(王-)

회안이에서 배나무골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왕이 넘어 다닌 고개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지명의 선행요소로 나타나는 왕은 大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하여 왕재는 크고 높은 고개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곳의 왕재는 높지 않다. 왕재고개는 재와 의미가 같은 고개를 덧붙인 어형이다.

회안반석(會安盤石)

회안이 서쪽 무이봉 기슭 계곡에 있는 바위이다. 회안에 있는 넓은 돌이라는 뜻이다. 한학자들이 이 바위에 올라 한가롭게 강론도 하고 한시도 읊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회안반석은 회안에 있는 돌일 뿐이다. 경치가 빼어나 진천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 죽현리

거북바위

거북산위에 있는 바위이다. 거북이처럼 생긴 바위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조선의 천기를 보니 조선의 중심지에 거북이 한 쌍이 명나라를 노려보고 있어 자기 나라에 변란이 잦다고 보아이곳에 있는 거북이의 목을 치고 앉아 있는 방향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돌려놓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만디/만죽리(晩竹里)/만승리(萬升里)

죽현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옛날 흉년이 든 어느 해에 큰 부잣집(영의정 허적의 집)에서 쌀을 만 되나 내놓아 주민을 구휼했다고 하여 만되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만디가 된 것으로 설명한다. 이 마을 이름을 따서 만승면이라는 면 이름을 만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동(四洞)

한자 지명 사동으로 뱀고개, 기와집말, 온수동, 절터골 등의 네 마을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원수동(-水洞)/온수동(溫水洞)

사동의 한 마을로 만디 남쪽에 있다. 원수동의 원수를 怨讐로 보아 마을에 살던 한 불효자식이 원수를 갚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원수동은 온수동에서 변형된 어형이기 때문이다. 온수동은 따뜻한 물이 솟는 동네라는 뜻이다. 느티나무 밑의 샘에서 항상 따뜻한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한다. 지금 샘은 폐쇄되어 물을 먹을 수 없다.

• 금곡리

모치울/마차(馬差)/마차리(馬差里)

용소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마을의 지형이 모가 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모치새(수알치새, 올빼미과의 큰새)가 많이 서식하여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모치울의 울은 골의 변형인 것은 분명하나 모치의 어원은 알 수 없다. 마차는 馬差로 보고 있다. 이곳이 말이 끄는 전쟁 기구인 마차를 고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한다.

소우물/소물/금천(金泉)/금천리(金泉里)

용소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허적이 이곳에 내려와 사는데 마을 우물에 늑대가 빠져서 우물물을 먹을 수가 없게 되자 쇠뚜껑을 해서 덮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허적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우물을 팔 때에 돌 대신 쇠를 녹여 만들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지금도 이 우물에 쇠가 둘러져 있는 것을 보면 소우물이 쇠를 이용한 명칭임을 짐작할 수 있다.

용소(龍沼)/용소께(龍沼-)/용소리(龍沼里)

모치올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 하천가(구암천) 논에 둠벙이 있었다. 그 둥병에 용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승천하였다고 하여 그 둠벙을 용소라 불렀다고 한다. 용소 주변에 있던 마을을 용소 가까이에 있다고 하여 용소께라 불렀다. 이곳은 수해 상습지역이어서 1976년 경 취락 구조 개선 사업으로 서쪽 길 건너로 마을을 이주하여 현재의 용소 마을로 불린다.

• 월성리

담안/장내(墻內)

월골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담의 안쪽이라는 뜻이다. 300년 전 허씨가 큰 담을 치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 안쪽 지역을 가리킨다.

옻샘

쇠산골 복판에 있는 샘이다. 옻은 옻나무 진이 피부에 닿아 발생하는 접촉성 피부염이다. 빨갛게 붓거나 물집이 생기거나 하여 매우 가려운 것이 특징이다. 옻이 오르면 찬물로 세척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찬물이 피부의 열을 식히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 찬물 중에서도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찬물을 제공하는 샘물이 특효가 있다. 그리하여 옻을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는 찬물이 나오는 샘을 옻샘이라 한다. 곧 옻샘은 옻을 고칠 수 있는 양질의 물이 솟는 샘이라는 뜻이다.

월곡(月谷)

담안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 여덞 집이 살고 있다. 지형이 보름달 형국이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설명하나 믿을 수 없다. 전국에 월곡이라는 골짜기가 대단히 많다. 대체로 달골, 다라골, 다리골, 다리실, 다래울 등의 속지명과 함께 쓰인다. 이 가운데 달골이 기원형이다. 달은 본래 산의 뜻이나 지명의 선행 요소로서는 高의 뜻을 보이기도 한다. 이에 따라 달골은 산에 있는 골짜기 또는 높은 지대에 있는 골짜기로 해석한다. 월곡도 이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자료관리 담당자
  • 광혜원면 총무팀 연락처 043-539-8722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출처표시+변경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