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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6호 상원사 동종의 "千年에 얽힌 이야기" 展 게시물 상세보기
국보 제 36호 상원사 동종의 "千年에 얽힌 이야기" 展
작성자 관리자 조회수 2731 등록일 2017-01-18 10:49:02
기간 2012-11-06~2013-03-31
첨부파일
국보 제 36호 오대산 상원사 동종
“千年에 얽힌 이야기” 展
 
오대산 상원사에는 현존하는 고대 범종 중에서 가장 오래된 통일신라 범종이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가 최고의 금속예술품을 만들어 내던 시기에 제작된 이 종은 현재까지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한국범종을 대표하고 있다.
본 전시에서는 통일신라 성덕왕 24년 (725년)에 제작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상원사 동종의 천여 년에 얽힌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안동에서 오대산으로
 
樓門古鍾
重三千三百七十九斤撞之則聲音雄亮遠可聞百里江原道上元寺乃
內願堂也欲置遠聞之鍾求八道本府之鍾爲最成化己丑以
國命將移運踰竹嶺鍾幽吼極重難越折鍾乳送本府後可運至今在上元寺
 
-『永嘉誌』卷之六 二-
 
누문고종(樓門古鍾)
무게가 삼천삼백칠십구근이다. 치면 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멀리는 100리 까지 들을 수 있다.
강원도 상원사는 내원당으로 멀리 들리는 종을 전국에서 구하였는데 본부의 종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다.
성화 기축년(1469)에 나라의 명으로 종을 옮기게 되었는데 죽령을 넘을 때 종이 깊이 울부짖고 무게가 매우 무거워져서 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종유를 떼어내어 본부로 돌려보냈는데 그런 후에야 움직일 수가 있었다. 종은 지금 상원사에 있다.
 
-『국역 영가지』, 안동 영남사, 1991-
 
 
 
화마(火魔)로부터 종을 지켜낸 한암대사
 
한암중원(漢岩重遠ㆍ1876~1951)
 
상원사 큰 법당은 해방 직후 큰 화재로 불에 타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때 종각도 함께 연소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한암대사는 물을 구할 수 없는 화급한 환경에서 절의 귀중한 식량인 장독의 장을 옮겨 불을 꺼 상원사 동종을 지켜냈다.
그 뒤 6.25가 터지고 1951년 초 오대산 일대의 암자와 사찰을 소각하던 국군 수십명이 들이닥쳐 사찰을 소각할 것이니 모두 떠나라고 명령했다. 1951년 1월2일, 3일 일이었다.
한암 스님은 가사장삼을 입고 법당으로 가 좌정한 뒤 조용히 말했다. “나야 어차피 죽으면 다비를 할 것이니 내 걱정 말고 어서 불을 지르시오.”
당황한 국군이 스님을 법당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스님은 다시 “당신이 군인의 본분에 따라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듯이,
나 또한 승려의 본분으로 이 절을 지켜야 하니 나는 마지막까지 승려의 위치를 지키다 죽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스님의 법력에 감화된 부대지휘관은 상부의 명령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한암 스님이 계신 방을 제외한 모든 전각의 문을 뜯어다가 불사르고,
사찰을 소각하고 왔다는 증표로 옻칠을 한 까만 죽비를 받아가지고 철수한다.
유엔군의 초토화 작전으로 오대산내 월정사를 비롯한 사찰과 민가 문화재가 모두 불탔지만 상원사는 한암 스님의 법력으로 소각 위기를 벗어났다.
 
 
천년의 울림을 멈추다
 
1976년 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인 염영하 박사의 조사결과에 의해 상원사 동종의 하대부분에 금이 간 것을 발견하고 타종을 금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1979년 문화관리국과 성종사 대표 원광식, 서울대 기계공학과 염영하 박사에 의해 용뉴의 귀 부분과 음관, 하대 문양 일부를 재생 조각 후 보존처리하였다.
하지만 종의 균열이 발생됨에 따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되어 상원사 동종은 1,254년 동안의 오랜 울림을 멈추고 휴식기에 들어간다.
 
 
 
한국 범종 연구의 시작
 
한국범종은 동양 삼국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기술력과 예술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고유의 기술을 잃어버리게 되고
일본종을 만드는 기술이 전승되어 근현대를 거치며 통일신라 범종같이 아름다운 종을 만들 수가 없었다.
1976년 당시 최고의 전문학자들과 최고의 기술자가 함께 모여 한국 범종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범종의 도면과 문양을 총 정리한 서울대 기계공학과 교수 故 염영하 박사님과
한국 범종의 미술사적 연구를 총 정리한 동국대 미술사학과 교수 故 황수영 박사님의 만남은 한국 범종 연구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두분의 학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한데에는 지금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의 노력이 컸다.
공학과 미술사 모두의 학술조사가 있어야만 완벽한 범종연구가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던 원광식 장인은 한국범종연구회를 창립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
한국범종연구회는 2007년 사단법인으로 재 창단되어 현재 (사)한국범종학회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다
 
1983년 문화재 관리국에 의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제작기술 개발실 남철열 교수팀과 종 전문 제작회사인 성종사 (대표 원광식)에 의해
당시 최고의 기술력을 동원해 상원사 동종을 재현해 보물 종은 보물고에 안치되고 새롭게 제작된 종을 2층 종루에 걸어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원광식 주철장과 한국범종연구회는 천년의 기술인 밀랍주조공법을 완벽히 재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제작된 상원사 종은 사형주조공법에 가까운 방법으로 제작되어 문양의 표현이 세밀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천년의 기술로 다시 태어나다.
 
종을 만드는 장인 집안에서 태어나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던 원광식 주철장은
1983년 당시 최고의 기술로 제작되었던 상원사 동종에 대한 미련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많은 종을 만들었고 점점 더 기술력도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또한번 통일신라시대 범종을 재현할 기회가 주어졌다.
일본 시마네현에 있는 광명사로부터 한국종인 광명사 종을 복제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것이었다.
이때부터 원광식 주철장은 천년의 기술에 대한 연구에 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 등 해외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수없는 실험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천년의 기술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수많은 자료와 연구 결과를 수집하고 거듭되는 실패에 포기하고
싶을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1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1997년 천년의 기술을 재현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원광식 주철장은 지금도 끊임없이 연구하며 그 결과물을 기록하고 전승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우리의 소중한 기술이 후학들에게 전해지고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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