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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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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강세황 묘소
  • 분류지방지정문화유산 > 문화유산자료
  • 거주지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 510-10
  • 지정지방기념물 제83호(2011. 3. 4)
  • 시대1791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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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豹菴 姜世晃(1713~1791)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평론가로써 詩·書·畵 三絶로 불렸고 당시 畵壇에서 '禮願의 總帥'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本貫은 진주, 자는 光之, 號는 忝齋·山響齋·樸菴·宜山子·蠒菴·露竹·豹菴·豹翁·海山亭·無限景樓·紅葉尙書 등이다. 6세부터 글을 짓고 8세 때 肅宗 國喪에 어울리는 鳩杖에 대한 시를 짓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兄 世胤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32세 때 妻家인 安山으로 옮긴 뒤 약 30년간을 지내면서 문인으로서 시·서·화를 고루 갖추고 그 깊이를 더해갔으며, 安山15學士․驪州李門의 인사들 및 藝人들과 교유하였다. 1763년 영조가 그가 서화를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 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하자, 이에 감격하여 이때부터 거의 20년 동안 붓을 놓고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1773년 영조의 배려로 61세의 나이에 처음 벼슬길에 올랐다. 1776년 耆耉科, 1778년 文臣庭試에 수석합격하여 官階가 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그 뒤 英陵參奉,司圃別提,戶曹參議,兵曹參議,漢城判尹 등을 두루 거쳤다. 1784년 千秋副使로 北京에 갔을 때 德保·博明·金簡 등 당시 중국 지식인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의 문화적인 면모와 긍지를 발휘했다. 1790년 78세에 知中樞가 되었다.

묘소는 조선시대 일반적 형태로써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을 세우고 좌우로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각 1조의 배치형태(配置形態)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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