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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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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이상설 생가
  • 분류지방지정문화재 > 기념물
  • 소재지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이상설안길 10
  • 지정지방기념물 제77호(1987. 3. 31)
  • 시대조선후기
  • 규모대지 376평, 건평12.35평안채 및 헛간채
  • 재료목조 초가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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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내용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선생이 태어난 생가로 목조초가집으로 안채와 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은 현 가옥에서 학자이신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나 189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교수, 한성 사범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면서 영어, 프랑스어 등 7개국어를 구사하여 신학문을 깨우쳤다.

1904년에는 보안회의 후신으로 대한협동회를 조직하여 민족 운동을 하였으며, 탁지부 재무관 법부협판을 거쳐 1905년에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인 11월7일에 수옥헌에서 이또 주재하에 대신회의가 강제 개최되어 이완용 박제순등의 찬성을 조약체결을 선언하였는바 선생은 대신회의에 실무 책임자임에도 일본군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에 알게되어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1906년 4월에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이동녕, 정순만과 같이 망명길에 올라 상해를 거쳐 북간도 용정으로 가서 서전서숙을 건립하고 자비로 항일 민족교육을 시켰으며 1907년 6∼7월 헤이그에서 개최하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라는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한국의 실권과 국권의 회복문제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후 이준은 현지에서 순사하였다. 선생은 귀국하지않고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여러나라로 다니면서 일본의 침략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이 동양평화의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소련령으로 이주, 한흥동의 한인마을을 건설, 민족교육을 시키다 1917년 47세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찾아가는 길

  • 시내버스로 진천에서 초평방면으로 약3km(5분)를 가면 도로 좌측으로 이상설생가 입구 푯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하차후 포장길을 따라 2km를 도보로 가면됨.
  • 자가용으로 진천에서 초평 방면으로 약 3km를 간뒤 좌측으로 2km를 가면된다.

찾아오시는 길

자료관리 담당자
  • 문화홍보체육과 관광팀 임태영 (043-539-3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