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본문 바로가기
대메뉴 바로가기
부메뉴 바로가기

광혜원면

광혜원면

광혜원리(廣惠院里)

  • 상신(上新)마을
    상신마을은 구한말시대에는 일부가 죽산군(竹山郡)에 속해 있었기에 죽산말이라고 불렀다. 또 앞에는 강이 흘러서 조각배를 띄웠기에 선창거리라고 동명을 불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말엽에 광동마을을 상신(上新), 중신(中新), 하신(下新)이라고 하여 오다가 1962년 3월 1일에 상신, 하신 2개 마을으로 편성되었다.
  • 하신(下新)마을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마을이 베틀같이 생겼다 하여 바들실이라 불렀으며, 근래에 와서 바들말이라고 하다가 바듬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바들말이 바듬말로 화(化)한듯 하다. 현재는 광동으로 통칭한다.
  • 상리(上里)마을
    상리마을을 윗술말, 윗술막, 주막거리, 대막거리 등으로 부른다. 옛날 광혜원 역사 무궁이있던 곳으로 이 마을을 무궁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 공무(公務)를 띄고 여행하는 공무원들을 위하여 여관을 국가에서 운영하여 왔다. 이 원(院)은 나중에 주막으로 변모하였으며, 여관 여인숙으로 변하고 말았다. 」 여기는 조선시대 한양으로 통하는 대로(大路)였다. 한양을 왕래하는 상신들과 나그네들의 휴식처요, 유숙처(留宿처)였다. 또 역에는 통신용으로 교통의 수단으로 역마를 두고 여기에 종사하는 역장, 역이, 역졸, 역정등의 관원이 배치돼있던 곳이다. 또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란 책에는 광혜원은 충청도 신구 관찰사 이취임시(忠淸道新구觀察使離就任時)의 교인(交印) 장소로 기록되어 있다. 관찰사가 새로 부임하면 이곳에서 사무인계인수를 하고 도장을 찍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교인소(交印所)에서 조선 시대에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 충청감사)가 도임(道任 ~ 지금의 부임)하거나 이임(離任 ~ 전근하여 가는것)하였다 한다. 상산지를 보면 여기 금계양류(錦溪楊柳)니 금계완사(錦溪浣紗)라고 하여 상산팔경(常山八景)으로 경치 좋은 곳으로 손꼽히고 있던 곳이다. 지금은 냇물이 별로 없지마는 그 때에는 배를 띄우고 선유를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곳의 풍경을 즐기며 놀이를 온 시인들이 지은 한시에서 고증할 수가 있다. 금계 양류라 하였으니, 시냇가 양쪽에는 버드나무를 심어서 아람드리가 되었을 것이니, 경치가 좋았을 것이다. 또 건너 마을을 바듬말이라 한다. 그것은 버들마을이 "바듬말"로 변한 듯하다. 여기서 관찰사가 교인을 한 뒤에 기생을 데리고 뱃놀이를 하였다. 그 때의 풍정은 헤아릴 수 없이 좋았을 것이다. 금계완사(錦溪浣紗)라고 하는 것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금계에서 기생들이 비단옷을 입고 재미있게 놀이를 하였다는 뜻이다.
  • 중리(中里)마을
    중리마을을 중말이라고 한다. 중말은 광혜원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중말이라 불린다. 전에는 상리, 중리를 합치어 중말(중리)이라 하던 것을 1969년 1월 1일 현재 상리, 중리로 분리하였다. 중리마을은 마을 형성 당시에는 조리 대나무가 무성하여 대 죽(竹) 자 마을 리(里) 자를 써서 죽리라 하였다는 것이다.
  • 장기(場基)마을
    장기마을을 장터라고 한다. 또는 장대(場垈)라고도 한다. 장기는 마당 장(場) 자와 터 기(基) 자를 써서 장기라 하는데 장터이기에 장기가 된 것이다. 또 한 설은 조선시대에 시장이 3월 8일로 결정되자 여기가 장터가 되었다. 장을 보는 것을 장끼를 본다 하는데 장끼가 하기로 변한 것이라 한다.

실원리

  • 실원마을
    실원마을을 실안이라 한다. 실원리는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과 경계를 이루고 본군의 가장 북단(北端)에 위치한다. 실안이를 대실이라 하고 작은실안이를 소실이라고 한다. 실안이는 원래 살기좋은 곳, 편안한 곳이라 하여 실안(安)이가 되었다 한다. 특산물로서는 고추를 많이 생산하며, 유실수로 감나무가 많다.
  • 동주원(東注院)마을
    동주원은 옛날 경기도 죽산군 남면(南面)에 속해있던 것이 1914ㆍ3ㆍ1 진천군에 폐합 되었다. 원(院) 자가 붙은 지명은 옛날 역원이었던 곳으로 되어있으며, 원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推定)을 한다.

구암리(鳩岩里)

  • 구암(鳩岩)마을
    구암마을을 병무관(兵武館) 또는 병목안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대 여기가 병무관 터라고 하며 화랑들이 연무대(鍊武대)로 사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옛 터는 마을 동쪽에 있고, 지금부터 800여 년 전에 여기서 금귀고리가 나왔다고 한다. 여기서 조금 가면 쏠고개가 있는데 여기가 활을 쏘는 연습장이라 본다. 병무관을 중심으로 감자골이 있는데 암자(庵子)골이 원명(原名)이었고, 절이 있었던 곳이다. 또 당고개(堂峴)가 있는데 여기서 와편(瓦片)이 나오고 있다. 구암리는 비둘기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비둘기 구(鳩) 자와 바위 암(岩) 자를 써서 구암이라 하고, 한때 중암(中岩)이라고도 했다. 마을 동남쪽에 구암저수지가 있어, 영농에 큰 구실을 할 뿐더러 낚시터로 경향 각지에서 태공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 감자골 암자골(庵自洞)
    광혜원면 구암리(鳩岩里) 병무관(兵武館)에서 오른편으로 조그마한 산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조그마한 골짜기가 있는데 지금은 경사진 밭이 있다. 이 골짜기를 암자골이라 한다. 신라시대에 이 절에 유명한 도승이 있었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절에 유명한 도승이 있었기에 불공을 올리려 찾아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5계를 지키고 있는 중은 살생을 하지 않는다. 이 절에도 언제 생겼는지 모르지마는 빈대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빈대는 날마다 퍼지기 시작하여 절은 폐하고 말았다. 지금도 절이 있었던 곳에서는 기왓조각이 나온다. 빈대가 너무 많아서 절이 망하였기 빈대 절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구항(鳩項)마을
    구항마을을 비들미기 또는 비들머기라 한다. 구 상산지(常山誌)를 보면 비들기 구(鳩) 자 목뒤 항(項) 자 구항으로 나와 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비둘기를 이용하여 통신 전령(通信傳令)이 이루어질 때 비둘기들이 이곳에 모여 훈련을 받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비둘기목이 비들머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 무수(無愁)마을
    무수마을을 무술이라 한다. 무술 뒷산을 넘어서면 경기도 안성군 금광면 옥정리(玉井里)에 이른다. 이 고개를 무치(武峙)라 하고 무위치(無爲峙)라고도 한다. 무수동(無愁洞)에 대하여 상산지(常山誌)에 있는 말을 인용하면 산이름은 요순산(堯舜山)이며 고개 이름은 무위치(無爲峙)며 동명은 무수동이라 하였다. 무수동이란 없을 무(無) 자와 근심 수(愁) 자를 쓴 것을 보면 근심이 없는 동네라는 뜻이며 임진왜란 당시에도 아무 근심없이 피란하였다 한다. 또 한 설은 무술이란 동명이 붙은 것은 호반 무(武) 자와 재주 술(術) 자를 써서 무술이라 하며 옛날 이곳에서 무예(武藝)를 닦던 곳이라는 설도 있다. 40여 호에 감이 많이 나온다.

회죽리(會竹里)

  • 죽동(竹洞)마을
    죽동마을을 댓골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 대나무가 많았던 모양으로 그 대를 이용하여 활화살을 만들었다 하며 조선시대에는 대를 이용하여 붓을 만들어왔다 한다. 이에 연유하여 댓골, 죽동(竹洞)이라 하였다 한다. 40여 호 되며 전주 최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고추가 많이 생산된다.
  • 이목(梨木)마을
    이목마을을 배나무골이라 한다. 배나무골은 옛날 배나무가 많기로 유명하여 배나무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 회안(會安)마을
    회안마을을 회안이라 한다. 무의봉(無爲峰) 기슭 계곡에 반석(盤石)이 있는데 1년에도 수차 한학자(漢學者)들이 편안하게 모여서 강론(講論)하고 한시(漢詩)도 읊었기에 반석명을 회안반석(會安盤石)이라 칭하고 동명을 회안(會安)이라 하였다. 상산지에 한시가 있기에 내용을 소개한다.

    지원(祗園) 떠나 돌아오는 길에
    회안반석 찾으려
    산돌매하고 가도가도
    골짜기만 깊구나
    시냇가에 돌은 여기저기 흩어졌고
    물은 얕은데
    떠다니는 구름이 해를 가리더니
    또 숲조차 무성하구나

    새로 물든 단풍만이
    저 혼자 청산색(靑山色)을 띄었는데
    그윽한 폭포수 외치는 소리
    벽해(碧海)가 깊은 듯
    조용히 누워 지난날을
    도리켜 생각하니
    흩날리는 백발에
    촌음조차 아깝구나

    해경 홍종익(洪鍾翊)
    단장짚고 소나무 우거진
    곳을 찾아 드니
    소로(小路)는 꼬불꼬불 날 인도하것만
    가도가도 끝이 없구나

    시 한수에 선인들의 자취
    감개도 무량한데
    이 고장 들어서니
    태고풍(太古風) 아직도 그득하구나

    아름다운 수석(水石)은
    천만년 이름을 전하는데
    경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건만
    사산(四山)만 아무 말 없네.

    반나절 그윽한 회포(懷抱)
    아직은 가시지 않았는데
    바쁘게 돌아가는 나막신길
    석양이 재촉하누나
    유야 이원회(李源會)

    지금도 등산객, 피서객, 뜻있는 인사들이 연일(連日) 꼬리를 물고 드나든다. 모두 반석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곤 한다. 이 마을은 50여 호 가구에 문화 류씨(文化柳氏)와 해주 오씨(海州吳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금곡리(金谷里)

  • 금천(金泉)마을
    금천마을을 소물이라 한다. 쇠로 우물을 만들었다 하여 쇠우물, 쇠물, 소물로 변하였다. 조선 숙종때 정승(政丞)을 지내던 허적(許積)이 출생한 곳으로 이곳에 별장(別莊)을 마련하고 우물을 만드는데 돌대신 쇠를 녹여서 우물을 만든데 연유하여 쇠 금(金) 자 샘 천(泉) 자를 써서 금천이라 하고 쇠물이라 한다. 소물을 외금천(外金泉), 안소물을 내금천(內金泉)이라 한다. 현재 50여 호 가구에 김해 허씨(金海許時)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용소(龍沼) 마을
    조선 시대에 회안 반석이 있는 곳에 구렁이가 살고 있었다. 몇백 년이나 되자 구렁이는 용소 있는 물 속으로 이사를 했다. 용소에서도 몇십 년 묵게 되었다. 어느 청명한 날이었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모이더니 대줄기 같은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한다. 그 때에 용소에 있던 구렁이는 소나기 줄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 갔다. 하늘로 올라간 뒤에는 언제 소나기가 왔냐는 듯이 날이 맑게 개였다. 그리하여 이곳을 용소(龍沼)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용소에 모여서 제사를 정성껏 지냈다. 그 뒤부터 이 마을에 몇 해 동안 풍년이 들었으며 민심이 순후해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십여 년 전에 어느 노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 모치올마을
    모치올이 상산지(常山誌)에는 모퉁이 각(角) 자와 굴 곡(谷) 자를 써서 각곡(角谷)이라 기록되었다. 지형상으로 보아 모가 지어있는 골짜기라 하여 모치올이라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모치란 수알치새를 말한다. 이 모치가 이곳에 서식하여 모치(수알치새)가 많은 곳으로 이름이 있었다. 이에 연유하여 모치올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모치(수알치새)란 올빼미과의 큰 새이며 날개 길이 44 ~ 47 cm, 얼굴은 대개가 적회색이며 흑색 무늬가 옆으로 있다. 등은 적갈색의 바탕에 불규칙한 흑색 얼룩점이 있다. 윗부리 끝은 밑으로 구부러져 있어 먹이를 뜯어먹는데 편리하게 되어 있으며 빛깔은 흑색이라 발꿈치까지 털이 있어 잡아 먹을 동물에 소리없이 접근하는 것이 특징이다. 먹이로는 작은 새와 쥐 따위의 작은 동물을 잡아 먹는다. 분포는 한국, 중국, 일본 등지이다.

죽현리(竹峴里)

  • 죽현(竹峴)마을
    죽현마을을 만디라 한다. 옛날에는 이 마을을 만죽동(晩竹洞)이라 하였다. 대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100여 호가 넘는 이 마을은 윗만디, 양달말(양 만 ㆍ陽晩), 음달말(음만 ㆍ陰晩) 등으로 나누어 부른다. 고려시대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며 김해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필현(筆峴)마을
    필현마을을 붓고개라 한다. 또는 북고개라고도 한다. 옛날 이곳에서 붓을 만들던 것에서 연유하여 붓고개가 된 것이다.
  • 사동(四洞)마을
    사동은 4개 마을을 통칭하여 사동인데
    • 절토골-고려시대에 형성된 마을이며 절이 있었기에 절골(寺洞)이라 부르다가 절터골로 부르고 있다.
    • 온수동(溫水洞)-온수동은 느티나무 밑의 샘에서 항상 따뜻한 물이 나와 이에 연유하여 온수동이라 한다.
    • 기와집 말-기와집말은 기와집이 많아서 기와집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 뱀고개-뱀고개는 전에 떼뱀이 많아 뱀고개가 되었다 한다. 이 사동 큰길 가에 금구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학부형들의 교육열이 대단한 곳이다. 약 70여 호 가구에 오봉 현씨(梧鳳玄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월성리(月城里)

  • 월성(月城)마을
    월성마을을 담안이라 한다. 마을 남쪽 지형(地形)이 반달같은 산이 둘러싸여 성(成)을 이루고 있다. 성 안에 위치한 본 마을을 담 안에 있다 하여 담안이라 한다.
  • 월곡(月谷)마을
    월곡마을을 검성(儉城)골이라 한다. 월골과 검성골을 합쳐 월곡이라 부르고 음성군 대소면 대풍리와 경계를 이루며 들 복판에 위치한 마을로 달과 같이 생겼다 하여 월곡이라 칭한다고 한다.
자료관리 담당자
  • 광혜원면 총무팀 최용우 (043-539-8722)
  • 최근 업데이트 : 2019-06-28
출처표시+변경금지 이 게시물은 "공공누리 제3유형(출처표시 + 변경금지)"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