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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곡면

백곡면

석현리(石峴里)

  • 장대(場垈)마을
    장대마을을 장터라 한다. 옛날에는 돌고개라 하였다. 물물교환(物物交換)이 이루어질 때부터 이 곳은 소금장으로 유명하다. 충남 아산만 일대에서 생산되는 소금이 충청내륙지방인 괴산, 증평, 음성 등지에서 이곳 돌고개에 와서 소금을 사갔다 한다. 지금도 앞냇가에 소금소(沼)라는 곳이 있다. 백곡면 소재지이며 장터이기에 장대(場垈)라 부른다. 옛이름 돌고개라 한 것은 돌이 많아서 돌고개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 후 돌 석(石) 자, 고개 현(峴) 자를 써서 석현이라 한다.
  • 지곡(知谷)마을
    지곡마을을 지새울이라 한다. 강능 김씨 사혁공(斯革公)이 63세에 지문하부사 상서(知門下府事尙書)로 있을 때 우거지지(寓居之地 …타향에서 임시로 사는곳)를 찾다가 여기에 낙향(落鄕)하였다. 김공이 낙향한 후 앞으로 다가오는 일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이 모두 맞아 들었다. 동네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아는 것이 많은 예언자라고 모두 칭찬하고 근동(近洞)에서 이 마을을 알 지(知) 자와 일 사(事) 자를 써서 지사울이라 하더니 지금은 지새울로 변하였다. 지사울 이전의 동명은 와조동(瓦鳥洞)이라고 하였다 한다. 거금 600여 년 강능 김씨가 세거하고 있으며 종중(宗中)에서 신도비를 1978년에 세웠다.
  • 용암(龍岩)마을
    본 마을은 용암 모시골 안골을 합치어 용암이라 부른다. 만뢰산 줄기를 타고 동북쪽으로 내려오면 주머니 속에 동네가 들어 앉아 있는 형국이라 하며, 용암은 용바위가 있어서 용암이라 했고, 모시골은 모시 저(紵) 자 마을 동(洞) 자 저동이라 했는데 옛날에 모시를 생산하였다 한다. 안골은 산 골짜기 안에 위치하므로 안골이라 하며 옛날 이 일대에 잣나무 숲이 우거져 있던 곳이라 한다. 용암마을(용암 모시골 안골) 이 50여 호가 넘으며 강능 유씨(劉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구수리(九水里)

  • 구수(九水)마을
    구수마을을 구술 또는 구수골이라 부른다. 마을 뒤에 장군봉(將軍峰)이 있으며 옛날 삼국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군사 훈련을 이곳에서 연마하였으며 이 때 군사들의 말 먹이는 죽그릇을 아홉 군데에 설치하였다 하여 구실이라 불렀고, 마을 뒷산을 장군봉이라 불렀다. 안동네를 내구(內九), 학교옆동네를 외구(外九)라 칭하며 50여 호 가구에 김해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개죽(介竹)마을
    개죽마을은 개죽이, 가죽골, 대촌 등 이름이 많다. 또 한자로도 여러 가지로 쓰인다. 介竹洞, 嘉竹洞, 佳竹洞 이라고 쓰는데 글자는 틀리지만 음은 같다 하겠다. 신라시대에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할 당시 가죽으로 말 안장, 갑옷 등을 만들었다 하여 가죽골이라 하였다는 설과 동리 뒷산에 조리 대나무가 많아서 개죽 또는 대골 등으로 일컬어 왔다는 설이 있다. 마을 동편에 절터가 있어 지금도 깨진 기왓장이 나오고 있다. 40여 호에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송탄(松炭)마을
    송탄마을은 몇집 안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소나무를 구워서 송유(松由)를 만들던 곳으로 소나무 송(松) 자와 숯 탄(炭) 자를 써서 송탄이라 한다.
  • 구메바위마을
    옛날 엽돈재를 넘어가는 길목으로서 바위밑에 굴이 있어 이 굴을 통과하여 다니었다 한다. 이 굴바위를 구메바위라 하여 이에 연유, 동명도 구메바위가 되었다 한다.

대문리 (大門里)

  • 수문(水門)마을
    동네가 서쪽으로 만뢰산을 등지고 산계곡에 산재(散在) 위치하여 숨은골이라 하였다. 따라서 하수문, 절골, 궁수문, 쇠당이, 칡목, 새터, 대삼 등 자연마을이 골짜기마다 자리잡고 있다. 동리 입구에 돌벙거지가 있기에 돌벙거리가 숨어 있다고 하여 숨음이라 칭하였다 한다. 또한 옛날 군사 훈련을 할 당시 물을 가두었다가 이용하는 수문(水門)이 있었다 하여 수문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다. 수문골 50여 호 가구에 경주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대삼(大三)마을
    대삼마을을 대삼골이라 한다. 옛부터 10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으며 대삼, 새터, 칡목등 세 동네의 자연마을을 합쳐 대삼(大三)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50여 호 가구에 한산 이씨와 안동 장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갈월리(葛月里)

  • 노신(蘆新)마을
    노신마을은 대안말과 장성구리 두 마을이 있다. 지금처럼 농경지가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모두 갈대밭을 이루고 있어 갈대숲이 우거져 갈대 로(蘆) 자와 새 신(新) 자를 써서 갈대밭에 새로 생긴 동네라 하여 노신이라 하였다 한다. 20여 호 가구에 경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서수(西水)마을
    서수마을을 서수원이라 한다. 서수원은 엽둔재 밑에 있는 동네를 말한다. 엽둔재를 엽돈고개라고도 한다. 백곡면 갈월리에 있는 고개로 매우 험준하고 깊숙하며 조선시대에는 도적떼들의 소굴이 있었다. 그런고로 이곳을 왕래하는 상인이나 나그네들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또한 임꺽정이 한때 이곳에서 관원(官員)을 괴롭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시대에는 백제와 국경을 이루고 있었던 곳이기에 병정들이 진을 치고 주둔하였던 곳이 바로 서수마을이다. 당시는 이곳을 서술원(西戌院)이라 하였다. 지금은 서수원(西水院)이라 한다. 지금도 당시의 터가 남아 있다. 또한 옛날 역마가 있어 교통의 편의와 통신의 주역(主役)을 맡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일이다. 안성사람으로 홍계남(洪季男)이 의병 수천 명을 모군(募軍)하여 여기에 주둔하면서 왜군과 한바탕 싸워서 이긴 곳이다. 그 후부터 이 지방 사람들은 왜군의 침략을 받은 일이 없이 편안하게 지냈다. 조정에서 이 소문을 듣고 홍계남 공을 수원부사(水原府使)로 명하였다. 엽둔치(葉屯峙) 우측에는 홍계남 공이 왜군과 싸울 당시 쌓아놓은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은 20여 호 가구에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양백리(兩白里)

  • 상백(上白)마을
    본 마을은 상백과 청학동(靑鶴洞)의 두 자연마을이 있다. 고려 말기 이성계가 개국하자 고려 충신들이 속세를 떠나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모여 들어와 외부와 접촉을 피하고 살았으며, 깨끗한 선비들이 사는 곳이라 하여 약백이라 하였다 하며 상류에 위치한 마을을 상백(上白)이라 하며 하류에 위치한 마을을 하백(下白)이라 한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이 곳에 청학(靑鶴)과 백학(白鶴)이 살았다 하여 양백(兩白)이라 하였고, 청학이 살던 곳이라 하여 지금도 청학동이라 한다. 50여 호 가구에 동래 정씨, 경주 김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 하백(下白)마을
    양백리 계곡은 산세가 수려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수목이 울창하고 수원이 풍부하여 토지가 비옥하여 어느 골짜기나 개간을 하여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옛날에는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서 이곳에 은거하려는 선비들이나 정감록(鄭鑑錄)에 매혹되어 피란지를 찾던 인사들이 이 고장을 찾아서 많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하백마을만 하여도 자연마을으로 중백, 하백, 은골, 새터 등이 있으나 이제 많이 퇴거해 가고 현재 30여 가구에 충주 지씨, 청주 한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이티(梨峙)마을
    이티마을을 배티라고한다. 배티는 양백리 동북 계곡을 따라 차령산맥을 넘어 안성군 금광면 상중리로 가는 고갯길 터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무신년(戊申年)에 신천영(申天永)이 반역의 뜻을 품고 역도(逆徒)를 규합하여 여기에 주둔할 때였다. 과거 북병사(北兵使)를 지냈던 이순곤(李順坤)이 이 모습을 지켜보다가 80 노령이었지만 의분을 참지 못하여 사방에서 의병을 모아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신천영기가 이끄는 반역군은 80 농인인 이순곤 공의 의병에게 견디지 못하고,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도주하다 잡히고 말았다. 이때부터 신천영이 패한 고개라 하여 패티(敗峙)라 하더니 배티로 변하고 말았다. 또한 이곳은 천주교 탄압당시 신자들이 이곳 차령산맥속에 은거하며 주로 옹기장사로 포교활동을 하며 난을 피하여 오던 중 이곳 배티에서 교도(敎徒) 30여 명이 관군에 잡히며 모두 학살을 당하였다. 지금도 무명(無名)의 묘소들이 즐비하다. 천주교회에서는 매년 연례행사로 전국의 교도들이 이곳까지 순례행군을 하는 대행사가 실시되며 앞으로 성역화(聖域化)시킬 것을 추진하고 있다. 배티는 이미 옛날이 배티가 아닌 전국의 명소(名所)로 등장한 것이다.

성대리(城大里)

  • 성대(城垈)마을
    성대마을을 성터라 한다. 옛날 성이 있었기에 성터라 한다. 삼국시대에 국경을 이루고 있던 곳이고 보면 성이 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성터 앞에 성대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교육의 내실을 기하고 있다. 50여 호 가구에 진주 강씨(姜氏)와 해주 오씨(吳氏) 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모리(毛里)마을
    모리마을을 모니라 한다. 성터 성대 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내를 따라 1km 쯤 올라가면 모니동네 개울건너 동쪽에 상봉마을이 있고, 다시 동북쪽 계곡 3km 지점에 대명동 윗대명동 덕수봉 마을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대명동(大明洞) 계곡에는 청학과 백학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천년이나 묵은 대명이란 구렁이가 용이 되고자 깊은 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려고 해도 옆골짜기 학동에 살고 있는 학이 항상 방해를 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니 깊은 물을 사모(思慕)하였다고 하며 이곳을 모리(慕里)라고 하였다 한다. 그러나 지금은 모리(毛里)로 변하고 모니라 한다. 50여 호 가구에 경주 김씨, 동래 정씨(鄭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상봉(上峯)마을
    상봉마을은 모니앞 개울건너 동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본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뒷산 지형이 코끼리와 같이 생겼다하여 코끼리 상(象) 자와 산봉우리 봉(峯) 자를 써서 상봉이라 하더니 어느덧 상봉(上峯)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 대명(大明)마을
    대명마을을 대명동이라 하며 윗대명동 덕주봉등 자연마을이 있다. 대명의 유래는 전술한 바와 같으며 이곳 산천에서 더덕, 으름, 버섯 등이 특산물로 꼽히고 있다. 20여 호 가구에 경주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용덕리(龍德里)

  • 용진(龍津)마을
    옛날 대명동(大明洞)에 살고 있던 늙은 구렁이가 장마에 이곳으로 떠내려 와 살다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에 의하여 용진(龍津)이라 불리었다 하여 성대천(城大川)과 양백천(兩白川)의 합수(合水) 지역이 된다.
  • 점촌(店村)마을
    점촌마을을 점말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 천주교도들이 숨어 옹기그릇을 만들던 곳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마는 천주교도로서의 증인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흙으로 신자증(信者증)을 만들어 구워가지고 암행어사가 마패를 숨기어 가지고 다니듯이 신자끼리 나누어 가지고 이것을 증표로 삼아 서로가 알고 알리며 상부상조하여 난을 피하였다 한다.
  • 유곡(楡谷)마을
    유곡마을을 느릅실이라 한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이 느릅나무로 숲을 이루고 있어서 느릅실이라 불리어 왔다. 그러기에 느릅나무 유(楡) 자와 골 곡(谷) 자를 써서 유곡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근 40여 호 가구에 전주 이씨가 대성을 이룬다.
  • 덕가동(德加洞)마을
    유곡마을에서 양백천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10여 호 가구의 덕가동 마을이 있고 조금 더 가다 북쪽 산 속에 몇 집 안 되는 삼박골이라는 동네가 있다. 구한말 천주교 탄압 당시 천주교도들이 배티마을에 은거하면서 이곳을 비밀 통로로 하여 왕래하였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명암리(明岩里)

  • 명암(明岩)마을
    명암마을을 명심이라 한다. 본마을은 골짜기가 매우 깊고 항시 맑은 물이 흘러 바위가 깨끗하였기에 명암(明岩)이라 불렀다 한다. 또한 이 마을은 한 동네이지만 윗마을을 명심, 중간마을을 양달말, 밑마을을 동암(東岩)말이라 한다. 양달말의 밝음을 뜻하는 밝을 명(明) 자와 동암말의 바위 암(岩) 자를 따서 명암이라 하였다. 이 명심이 마을이 백곡 초등학교의 분교인 명암 분교가 있는 곳이다. 또한 충장공(忠壯公) 남연년(南延年 …1653~1728)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60여 호 가구에 강능 김씨와 충장공의 후손 의녕남씨(宜寧南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고 고추, 담배로 연간 농가 소득이 비교적 높은 마을이다.

사송리(沙松里)

  • 상송(上松)마을
    옛날에는 이곳을 송전(松亭)이라 하였다 한다. 윗마을에 위치하므로 상송(上松)이라 불렀다. 또한 사정이 동네에서 상송을 바라볼 때 울창한 소나무 사이에 동네가 있어 상송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30여 호 가구에 청풍김씨(淸風金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두주(斗酒)마을
    두주마을을 중심으로 새터말, 점말, 밤나무골 등의 자연마을이 있고 백곡 중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두주마을은 옛날 대주가(大酒家)가 있어 술을 말술을 먹었다 하여 말 두(斗) 자 술 주(酒) 자를 써서 두주라 칭하였다는 설도 있다. 새터말은 새로 생긴 동네요, 점말은 옹기그릇을 만드는 곳이며, 밤나무골은 밤나무가 많아서 밤나무골이라 한다.
  • 사정(沙亭)마을
    사정마을을 사정이라 한다. 조선 중엽 선비들이 산수가 수려한 이곳에 정자를 짓고 정자에서 글을 읽고 시를 읊으며 지내었다. 냇가의 백사장이 깨끗하고 넓어 정자이름을 모래 사(沙) 자와 정자 정(亭) 자를 써서 사정이라 하고 동명(洞名)도 사정이가 되었다. 신씨 일파가 처음 세거(世居)하더니 현재는 30여 호에 연일 정씨와 중화 양씨(楊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지구(池九)마을
    지구마을을 지구머리라 한다. 지금부터 500여 년 전(조선 초기)에 고씨(高氏)와 정씨(鄭氏)가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당시 아홉 골짜기마다 연못이 아홉 군데가 있어 지구머리라 하였다 한다. 현재는 고씨나 정씨나 살고 있지 않으며 마을 뒷산에는 고씨들의 묘소가 묵어 있고, 마을 앞산에는 정씨의 묘소가 있다. 뒷산은 고씨 앞산은 정씨가 똑같이 묘를 썼다 한다. 40여 호 가구에 양성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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