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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읍

진천읍

성석리

  • 지석마을
    괸들은 선사시대의 지석분묘유적이 있었던 곳으로 지석 즉 고인돌이 괸돌, 괸돌이 속칭 괸들로 부르게 되었다.
  • 성평마을
    세종 26년(서기 1444년) 음 3월 1일 대왕께서 한글창제에 너무 골몰하시어 안질까지 생기시어 치료차 청주 초정까지 가시는 도중에 이 곳 성평냇가(당시는 진천 냇가 현 진천 중학교 앞을 흘렀다함)에서 하룻밤을 쉬셨다 가신 후 성평이라 이름하게 되었고, 임금님이 행차한 곳에는 성자나 계자가 많이 동명에 붙는다고 한다.
  • 신대마을
    새터마을은 진천 중학교 뒤에 위치하고 있으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 터라 한다. 이런 예는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삼덕리

  • 덕문리
    덕문리는 위 덕문리와 아래 덕문리가 있어 상덕 하덕 이라 한다. 이 동네에서 글을 배운 사람은 덕이 많다하여 덕문이라 하였다 한다. 고려시대에 임연 장군의 집터였다 하는 못(둘레가 4 km)이 있었다. 덕문이 방죽의 연꽃 내음이 훈풍을 타고 사방에 진동 할 때 길가는 나그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 옹암마을
    독바위 동네입구 동산 밑에 천연적으로 생긴 항아리 모양의 바위가 있다. 그 래서 동명을 독바위라 하였는데 그 후 오씨가 왕성하자 동명을 오독바위라 하였다. 현재는 그대로 독바위라 칭하지만 이 마을은 전국적으로 자립 마을로 유명하다. 새마을 사업이 시작된 이후 집단농업을 경영하여 농가 소득증대는 물론 그 성과는 전국에 메아리쳐 가는 마을이다.

신정리

  • 옹정마을
    약 300년전에 민씨와 이씨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다. 식수용 우물에 독을 묻었으므로 독우물이라 하였고 그 샘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소강정마을
    마을전면에 통뫼산이 있고 산 끝에 소강(세금천 ‥ 옛날 내 이름)이 흐르고 강옆에 암석이 있다. 이 위에 정자를 지어 시인들의 시회도 있었고 또는 유흥장소로 이용하였기에 이 정자로 연유하여 동명이 소강정이라 하였다. 이 정자는 약천 남상공이 건립하였다는 전설도 있다. 지금은 유허만 남아 있다.
  • 원앙마을
    원앙마을을 원앙골이라 한다. 원앙골의 지형이 워낭지혈이라 하여 원앙골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앙이란 마소의 턱 아래에 늘어뜨리는 쇠고리, 또는 마소의 귀에서 턱 밑으로 늘어 단 방울을 말한다. 또 한 설은 원앙지혈이라하여 원앙새의 형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동리 뒷산에 묘지가 있는데, 이 묘를 건드리면 큰 화를 입는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벌초도 하지 않는다 한다.
  • 새끼미
    신석기시대부터 이 곳에서 돌로 칼을 만들던 곳이라 한다. 그러기에 석검이 새끼미로 변하였다 한다.
  • 쇠실
    지금은 두집뿐이지만 옛날에는 이 근방에 동네가 있었다한다. 그 이름 검실 즉 쇠실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원덕리

  • 원동
    옛날에 청주로 왕래하는 도로가 되어 있을 때 노숙자가 쉬어가는 숙소를 마련하였기 원동이라 칭하였다. 지금도 숙소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네 뒤는 봉화산이 있고 옛날 청주와 진천을 잇는 대로였다. 한티고개를 넘어서면 옛날 역원이 있었던 태락리가 나온다.

교성리

  • 향교꼴
    향교가 있어서 향교꼴이라 칭하게 되었다.
  • 학당이
    학당이는 지형이 학이 날아가는 형국이기에 학당이라 하였다. 앞산 높은 곳에 서 바라보면 과연 학이 날라가는 형국이다. 또 한 설은 동네 뒷산에(현재 과수원 자리) 경주 이씨들이 장사를 지내는데 상주 측에서는 "더 파라"고 하고 지관은 "그만 파라"고 하고 서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다가 상주측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더 파내려 가는 중 묘자리에서 학이 두 마리가 하늘 높이 날라가 버렸다. 그 후 학당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학당이 앞산에 사직골이라는 곳이 있다. 사직골 밤나무밭에 사직단이 있었던 곳으로 짐작이 되며 지금도 주춧돌과 기와장이 산재해 있다. 상산지에는 「사직단 재현서 이십정」이라 쓰여 있다.
  • 점촌
    점촌은 길상사 입구에 있는 마을이며 질그릇을 만들어 내는 옹기가마가 있어 점촌이라 칭하게 되었다. 대개 토기제조업에 종사하는 분들중에 천주교 신자들이 많으며 1850년 경에 천주교 금령이 엄하여 옹기그릇을 팔며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왔다한다.

벽암리

  • 적현마을
    저자목이라는 마을로 옛날에는 시장이 거의 성 밑에 이루어 졌던바 이 마을 역시 도당산성 밑에 위치한 곳으로서 물물교환을 하던 마을이다. 그러므로 시장의 시(市:저 자시)를 따서 저자목이라 지금까지 칭하고 있다. 한자로 적현이라 하였음은 옛날 장이 서는 날이면 보부상들이 피리 불고 풍물을 울리며 모여든 관계로 피리적(笛)자 고개현(峴)자를 써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큰 도로로 나오는 중간 지점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으니 이름하여 장고개라 칭하여지고 있다.
  • 수암마을
    동네입구에 수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었기에 바위 이름을 따서 수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지금도 마을 입구 논 가운데 바위가 있다.
  • 사랑깨
    옛날 저자목과 함께 장터로 주로 남정네들이 모여 놀던 곳으로 이를 이름하여 화랑깨라 하였는데 지금은 사랑깨라 칭하고 있다.

행정리

  • 내동마을
    행정리 전체를 살구물이라 한다. 살구물은 내동마을에 살구나무 옆에 우물이 있었다 하여 살구 우물이 살구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살구행(杏)자와 우물정(井)장를 써서 행정이라 하였고, 옛날 행정면 소재지이기도 하다. 그 후 마을수가 증가함에 따라 내동이라 통칭한다. 자연 마을은 안터, 안골, 도람말, 주막거리 등의 이름이 있다. 현재는 양성 이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중리마을
    상리, 중리, 하리로 옛날부터 전하여지며 웃말, 가운데말, 아랫말의 명칭이 상리, 중리, 하리로 된것이라 한다.

장관리

  • 원장관
    약 160년 전에 청주 한씨와 안동 김씨가 이 마을에 거주하였다. 현재는 각성이 살고 있다. 동명은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뒷동산의 모습이 긴 대나무와 같다하여 장관리라고 하였다 한다.
  • 구봉마을
    약 150년전에 원장관에서부터 이사를 오기 시작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처음 우거한 성은 송씨이다.
  • 사미마을
    약 700년전에 도봉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약 60호였다. 병오년 홍수로 인하여 마을이 분산하여 구봉, 사미 등의 자연마을을 형성하였다.

건송리

  • 일송정마을
    안동 김씨가 이 마을에서 200여년간 거주했다고 전한다. 김씨가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하여 동명을 일송정이라 하였다 한다.
  • 두건마을
    처음에는 두동이라 하였다 한다. 동네가 번창함에 따라 두건이라 하였다 한다. 원래 두건이 마을은 현 백곡저수지 안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1943년에 저수지 공사로 모두 이주하여 갔다.

연곡리

  • 보련골
    옛날 신라시대 절이 있었는데 극락세계를 연화세계라 하기에 연곡리라 하였다. 연화대와 관련을 지어서 보련골이라고 마을명을 정하였다 한다. 보련골에는 성암 초등학교 분교인 연곡 분교가 있고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1900년경에는 금광이 있어 한때 번창한 시절도 있었다 한다. 바로 뒷산이 진천에서 제일 높은 만뢰산(611.7m)이다. 이 산에서 서해 바다가 보인다고 한다. 산정에는 성지가 있고 병자호란 당시 류창국공과 조감공이 호병과 싸워서 승리하여 수천명의 피난민을 구하였다 한다. 그 후에 만노산이 만뢰산으로 변한 것은 만인이 힘을 입었다 하여 일만만(萬)자 힘입을 뢰(賴)자를 써서 만뢰산으로 변하였다 한다. 원래 산 이름은 만뢰산(萬賴山), 만뢰산(萬 山), 만노산(萬弩山), 만노산(萬奴山), 금물노산(今勿奴山), 물노산(勿奴山) 등 글자는 틀리거나 같은 음이 많다.
  • 비선골
    비선골을 비립동이라 한다. 비립동은 보물 404호인 석비가 있기에 비립동이라 한 것이다. 대백과 사전을 보면 비석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 비석 - 돌에 문자를 새겨서 세운 것. 비에 새긴 문자를 금석문이라 하며 귀중한 사료가 된다. 금석물의 기원은 중국의 하은주 시대에 있는 것으로 하나라의 우왕이 솥을 만들 고, 주 나라의 선왕의 석고에 새긴 것이 그 기원이다. 진시황 때에 태산 등지에 각석한 바 있고 한나라 이후로는 유경과 불경을 돌에 새긴 석경이 유행하였었다. 당나라에 들어오면서 더욱 성하여졌으나 이는 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비는 한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묘비에서 발달되었고, 비 뿐만 아니라 비의 1종인 갈도 있엇다.
    처음에는 백비 즉 문자를 새기지 않은 비였던 것이나 점차로 죽은 사람의 공덕을 새기게 되어 비로소 비의 기원을 이루게 되었다. 비라는 글자가 문헌에 나타난 것은 ≪의례≫와 ≪ 예기≫가 처음인 것으로, 진나라 이전에는 각석이란 말은 있어도 비란 말은 없었고 각석을 비라고 한 것은 한 나라에서 시작되었다. 갈도 한 나라에서 시작된 것으로 대체로 비중에서 장방형으로 된 것은 비이고 자연석의 1면을 갈아서 둥글게 한 것은 갈이다. 비와 같은 묘주의 관직과 지위에 따라 용도가 제한되었다. 비의 형식은 비신과 이수 귀부로 되어 있다. 이 수는 비의 갓으로, 뿔 없는 용을 조각하고, 귀부는 비의 기석으로서 거북 모양으로 되어 등에 비신을 꽂게 되었다. 비신의 겉면을 비양, 뒷면을 비음, 비양에 새긴 글은 비문 또는 명 비음의 글은 음기, 또는 비음이라고도 한다. 비에는 석비와 금속비가 있고 비문에는 석문과 금문이 있다. 이를 합하여 금석문이라 한다.
    비의 종류는 비문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어지나 대체로 순수비·기적비·신도비·능비·묘비·정려비·송덕비등이 있다. 한국에서의 금비는 조선 중엽 이후의 지방관의 치적과 송덕등을 내용으로한 송덕비, 애민비, 영세불망비등이 남아 있는 정도이나 석비는 허다하여 기공·의열·공덕·정려·유허·사거·성곽·대단·서원·묘정·빙고·교량·제지등의 각종 기적비를 비롯하여 북한산·황초령 등 3개소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진흥왕의 척경비와 백두산 정계비, 풍수설에 의하여 분묘의 동남쪽인 신도에 세우는 신도비·능비와 묘비·사찰비·사리탑의 탑비·충정을 표창한 정려비, 합비의 1종인 석종비·묘갈등이 있다. 분묘에 세우는 표석인 묘표와 분묘의 실전을 막기 위하여 분묘에 파묻는 묘지도 석문에 속한다고 쓰여 있다. 우리 나라에서 셋 밖에 없는 석비(일명 백비)의 하나가 우리 연곡리 비선골에 있다 함은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여기 석비에 대한 시 한수가 있기에 적어 본다.
    역옹 이 영길 공 시
    알 수 없구나 어느 연대에 누가 이 비를 세웠는고 기이한 형국은 신의 가로 깃들인 듯 하건마는
    글자 한 자 없으니 그 내력 전혀 알 수 없구
    전의 이씨 이 영길 공은 성균 진사 벼슬을 한 분으로 임진왜란 때 이 곳에 피난와 살기 시작하여 그 후손들이 지금 비립동에 살고 있다. 비선골에는 또 3층 석탑과 불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계리

  • 연평마을
    옛날에 이 곳에 연못이 있고 연못에는 연꽃이 황홀하였다 하여 연평이라 하였다.
  • 멱수마을
    상목, 하목으로 나눈다. 전에는 길상동이라 불렀다 한다. 신라시대에 절이 있었던 곳으로 절에서 미역을 빨면 그 물이 흘러 마을까지 내려왔기에 멱수라 한다. 또 청허당 이 거역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는 형국으로 벽소라 한다는 설도 있다.
  • 계양마을
    지랑이라도 하는데 계의 계가 지로 된 것은 구개음화 현상이다. 삼국시대에 김서현 장군이 만노태수로 부임했을 때에 만명부인과 같이 이 마을에 살았다. 여기가 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이다. 뒤에는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었다는 태령산이 있고, 이 곳에 길상사가 있었던 곳이다. 담안밭을 일명 장군터 장사터라고도 한다. 또 앞 개천 건너 투구 바위가 있는가 하면 동네 뒤에 연보정이란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떨어지는 일이 없고, 우물을 쌓은 기법이 신라시대의 것이라 하여 유명하다. 그 외에 치마대라하여 말을 훈련시키던 곳이 있는가 하면 군자터(사냥터)가 있다. 여기가 길상사의 유지다. 태령산에 오르면 사방이 한눈에 보이며 규모는 적지만 성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이 곳에 모여 전략의 요지로 삼고 있을 때 왜병들이 공격하기에는 너무 산이 가파르고 희생이 많을 것 같아 3일간만 포위하면 저 산에 물이 없으니 스스로 항복하리라 생각하고 태령산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러나 태령산성 의병들은 말에다 쌀을 끼얹기 시작하였다. 이를 바라보고 있던 왜병들은 깜짝 놀라 도망가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니 저 험준한 산성에 어디서 물이 솟아나기에 말몸에까지 물을 끼얹는고 하며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금암리

  • 금성마을
    동리 앞산에서 금이 많이 생산되어 금성골이라 하였다 한다.
  • 줄바위(휴암동)
    줄바위 동네 앞산을 휴암산이라 한다. 준엄한 바위가 깎인 듯 솟아 있어 마치 병풍을 두른 모습과 같다. 또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병정들이 대검과 창을 들고 서 있는 형국과 흡사하다.

사석리

  • 여사마을
    여사마을을 여술이라 한다. 1,500여년전 김씨가 정착하여 선비가 많이 낳았다 하여 여사마을이라 한다. 또한 금생여사란 말이 전해 오는데 이는 김씨 유생이 이곳에서 숙박하고 가서 과거에 급제 하였다 하여 금생 여사라는 말이 전하여 온다 한다. 이 마을에 성암 국민 학교가 자리잡고 있으며 유명한 사충문이 있어 오고가는 사람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 성암(聖岩)
    세조(世祖)대왕께서 이곳에 오시어 만뢰산과 양천산에 진을 치게 하시고 군사훈련을 하신 일이 있다. 그당시 대왕께서 직접 바위 위에서 진두지휘를 하신 일이 있다. 그후부터 성암이라 하였다 한다.
  • 돌패기
    석박이라 부른다. 원래 이곳은 돌이 많이 박혀 돌백이라 하였는데 돌패기로 변하였다 한다. 유명한 봉화산과 문안산을 등지고, 전개된 마을으로 이곳에 미사일부대가 주둔하고 있으며 전씨(全氏), 최씨(崔氏), 서씨(徐氏)가 기반을 잡고 있다. 또한 서한순(徐 翰 淳) 선생의 정려(旌閭)가 있는 곳이다.

지암리(芝岩里)

  • 놋점마을
    놋점을 유점(鍮店)이라고도 한다. 그 옛날 놋그릇을 만드는 곳이 있었던 모양이다.
  • 지장골
    환희산(歡喜山)과 충남 천원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덕유산과의 사이에 계곡을 이루고 잠덕산 기슭에서 지장골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도 그 절의 유허가 남아 있다. 여기 지장사에 대한 봉암(鳳岩) 채지홍(蔡之洪) 선생의 시가 있기에 소개 한다.

    아름다운 옥궁은 조용하고 엄숙한데 상서(祥瑞)로운 구름이 서리었구나
    한알 한알 움직이는 여승의 염주 소리는
    퍽 먼 옛적의 마음이로다.

    손가락을 꼽으며 고개를 숙여본들
    어디 가서 찾으리오

    조용히 고금(古今)의 모습만 더듬어 볼 뿐이로다.
  • 가술
    옛날부터 동명(洞名)을 가술(加述)이라 하였다 하나 그 이유는 전하지 않는다. 현재는 이씨(李氏) 안씨(安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한다.
  • 가암(加巖)마을
    가암마을을 덤바위라고 한다. 다시 큰 덤바위와 작은 덤바위로 나눈다. 이 마을 뒷산을 바위산이라 하며 바위산 위에 또 하나의 큰 바위가 있어 덤바위라고 한다.
  • 입장(笠場)마을
    입장골은 골짜기가 깊어서 입장골이라 한다.
  • 새말
    신리(新里)라고도 하는데 전답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하고 근방 주민들이 모여서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기때문에 새마을이라 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또한 이 동네에 성암 간이(簡易) 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이 마을 뒷산에는 한국군 창설 이래 최고의 무훈(武勳)을 세우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보내온 영예의 훈장을 받은 바 있는 군신(軍神) 고(故) 김영국(金榮國) 대위(大尉)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제2사단에서는 지금도 김영국 대위를 군신으로 추대하여 그의 얼을 군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산척리(山尺里)

  • 장척(長尺)마을
    장척마을을 장자울이라 한다. 고려시대 임연(林衍) 장군이 살던 곳으로 덕문이 방죽 가운데 바위로 울타리를 해놓고 장자(長者ㆍㆍㆍ덕망이 있고 노성(老成)한 사람)로 살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장자울이라 하여 오다가 행정구역 개편 당시 장척(長尺)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 동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한때 가난에 쪼들리어 이웃 동네에 가서 양식을 빌어다 먹었다 하여 동명을 빌어장자울라 하더니 수리시설을 하여 좀 살만하니 죽 정도는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자 죽장자울이란 동명이 붙게 되었다가 근래 와서는 살기 좋은 마을이라 하여 떡장자울로 불리게 되었다. 앞으로는 금장자울로 불리게 되었으면 한다. 지금도 논에서는 옛날의 적색 기와 조각과 구들장이 나오고 있다 한다.
  • 산직(山直)마을
    산직마을을 산직말이라 한다. 산직말이란 동명이 전국 도처에 많이 있다. 이는 산을 지키는 분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산직말이란 동명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 산직말이 보제 이 상설(李相卨)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의 유허비(遺墟碑)가 그 앞산에 서있다.

상신리(上新里)

  • 상가(上加)마을
    상가마을을 우렁터라 한다. 우렁터는 지형이 우렁같이 생겼다 하여 우렁터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설과, 또 한 설은 옛날에 이 곳에 우렁이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약 60여호 가구에 미곡 생산에 주력하고 있다.
  • 중가(中加)마을
    중가마을을 안골이라 한다. 안골은 아늑한 골짜기 안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이라 안골이라 한다. 근 50여 호 가구가 영농에 힘쓰고 있다.
  • 할미성
    산성(山城)의 모체인 대모산성에서 그 이름 한뫼성, 할뫼성, 할미성 그대로이다. 5세기에 축성(築城)된 것으로 추측되는 이 성은 겹성식 산성으로 내성(內城), 본성(本城), 외성(外城)으로 구성된 3겹성으로 우리나라 산성 형태 중에서 이형산성(異形山城)에 속하는 토성(土城)이다. 성의 규모도 내성의 둘레가 416.4m, 본성 둘레 609.6m, 외성의 둘레 649.2m 나 되며 성내에서는 4ㆍ5세기때로 추정되는 토기편(土器片)이 나오며 문화적 가치가 농후한 유명한 토축산성이다. 바로 이 산성 북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할미성이라 하며 약 17호 가에 주로 옹기를 주업으로 하며 요즈음에는 플라스틱에 밀려 사양길을 면치 못하고 있다.

송두리(松斗里)

  • 묵동(墨洞)마을
    묵동마을을 먹뱅이라 한다. 1500년대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며 일곱가구가 모여 먹(墨)을 만들어 글방에 다니며 팔았다. 또한 먹장사들이 이 마을 먹공장에 와서 먹을 사갔다. 이로 연유하여 먹묵(墨) 자 마을동(洞) 자 묵동이라 하며 먹을 만드는 방(房)이라 하여 먹방이로 불리우다가 먹뱅이로 변하였다
  • 사송정(四松亭)마을
    사송정마을을 사송정이라 한다. 옛날 거대한 소나무 네그루가 있고 그 솔밭 속에 정자가 있었으니 이로 연유하여 사송정(四松亭) 이라 한다. 소나무 한 그루로 인하여 일송정이란 이름과 비슷한 이야기다.
  • 이전(泥田)마을
    이전마을을 짐박골이라 한다. 옛날 어찌나 밭이 길었는지 이 고장을 짐박골이라 한다. 그리하여 진흙 니(泥) 자를 써서 니(이)전이라 하고 진밭골이 짐박골로 변한 것이다.
  • 외두(外斗)마을
    외두마을을 박말이라 한다. 1600년대에 경주 이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으며 지형이 바가지 같이 생긴 곳에 마을이 형성되어 박말이라 한다는 것이다. 20여 호 가구에 평양 조씨들이 대성을 이루고 있다.
  • 내두(內斗)마을
    내두마을을 텃골이라 한다. 이 마을 역시 1500년대의 마을이며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이고 동남쪽이 틔어 있어 집터로는 안성맞춤이라 하여 텃골이라 하였다고 한다.

가산리 (佳山里)

  • 산정(山井)마을
    가산리는 산세가 아름다워 가산리라 하였고 산정마을은 산우물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산기슭에서 자연적으로 흘러내리는 샘물이 있었다. 그 물이 약수(藥水)라고 전파되자 사방에서 남녀노소가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산 속에 우물이 있다고 하여 뫼산(山) 자 우물 정(井) 자를 써서 산정이라 하고 산우물이라 한다.
  • 주구(周九)마을
    주구마을을 응구리라 한다. 넓은 들판 산기슭에 자리잡은 응구리는 주산물이 미곡이다. 쌀을 생산하려면 아홉번을 응해야 쌀이 생산되므로 응할 응 자, 아홉 구(九) 자를 써서 응구리라 하였고 아홉번은 두루 살펴야 쌀이 생산되기에 두루 주(周)자 아홉 구(九)자를 써서 주구라 한다. 1650년대에 연안(延安)김씨가 처음으로 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현재 20여 호 가구에 연안 김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 가암(佳岩)마을
    가암마을을 갬절이라 한다.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솟아있어 아름다운 바위라 하여 아름다울 가(佳) 자와 바위 암(岩) 자를 써서 가암이라 하였고 옛날에 이 마을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신도들이 개미같이 모여들어 개미절이라 속칭이 붙었다는 설과, 절 근처에 개미가 무수히 많아서 개미절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은 근 100여 호에 이월면에서 단위 마을으로는 가장 큰 마을로 마을 기금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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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업데이트 : 2019-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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